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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똘레랑스
    유럽사회문화 2020. 7. 6. 11:17

    프랑스 : 노블리스 오블리제 기반의 사회 무너지나?

     

    내가 프랑스를 존중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민중의 힘으로 시민의 권력을 되찾았던 프랑스 혁명 때문만은 아니다.

    14세기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영토를 두고 전쟁을 했었는데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전쟁 중 칼레라는 프랑스 도시를 공격하게 된다. 이유는 전쟁 초기 칼레를 공격했지만 막대한 피해만 보고 성과 없이 공격이 끝이났고 에드워드는 전쟁 중에도 칼레를 무너뜨리지 못한 것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었다고 한다. 전쟁을 마무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칼레 만큼은 그냥 두고 떠날 수 없어 마지막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마땅한 지원을 받지 못한 칼레의 시민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항전하게 되었는데 성을 공격하게 될 경우 영국군 또한 적지 않은 피해를 볼 것을 경계해 공격보다는 포위를 함으로써 칼레시민들이 스스로 항복하도록 유도했다. 독안에 든 생쥐 꼴이 된 칼레 시민들은 협상을 하기 시작했고 에드워드는 칼레시의 지도자급 6명이 항복하고 목숨을 내 놓은다면 나머지 시민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칼레의 부자, 상인, 정치인들이 너나 할것 없이 스스로 먼저 자원하여 성밖으로 나가겠다고 했고 이에 감동한 에드워드가 6명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100년 전쟁을 마무리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는 이 사건을 크게 부각시켰고 바로 여기에서 사회지도층의 의무(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인해 국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프랑스 여행 중 로댕의 집에 방문한적이 있었는데 그곳 정원에 칼레의 시민들이라는 작품이 있어서 유심있게 관찰하였다. 내가 상상했던 칼레의 시민들은 영웅의 모습이어야 했는데 실제로 조각으로 표현된 시민들은

    아주 힘없고 의욕이 없어 보였다. 마치 내가 왜 가야해 라는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머리속이 복잡해 졌지만 아내의 설명을 듣고 곧 이해가 됐다.

     

    작품의 소재가 된 칼레의 시민 일화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칼레는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 본토와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백년전쟁 당시 칼레를 차지하는 것이 프랑스군과 잉글랜드 군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1347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군대는 칼레 시를 점령했고, 1년 여에 걸쳐 잉글랜드 군에 저항했던 칼레의 시민들은 학살당할 위기에 놓였다. 프랑스 작가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의 지도자급 인사 6명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살려주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에 시민 대표 6명은 다른 시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교수형을 각오하고 스스로 목에 밧줄을 감고 성문의 열쇠를 가지고 에드워드 앞으로 출두했다. 다행히 에드워드 3세는 임신한 태아에게 해가 될 것을 우려한 왕비 필리파 에노(Philippa of Hainault)의 간청을 듣고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칼레의 시민 일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시민 대표들이 도시민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놓았다는 기본적인 줄거리는 거의 같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상류층이 지니는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형적인 예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이 일화가 실화라기보다는 시민 대표들이 항복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행한 형식적인 의례가 후대에 점차 애국적이고 희생적인 미담으로 부풀려진 것으로 보고 있다. 1845년 칼레 시는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민 대표들의 지도자였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의 상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제작을 맡았던 조각가 다비드 당제(David d'Angers)의 죽음과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1871)의 발발로 계획은 오랜 기간 실행되지 못했다. 1884년 칼레 시는 고심 끝에 로댕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하지만 로댕이 1889년 완성한 기념상은 사람들이 기대한 애국적 영웅의 늠름한 모습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는 6인의 인물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거나 곧 닥칠 죽음에 침통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초인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극히 인간에 가까운 이 모습은 곧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이 기념상은 당초 세워질 예정인 칼레 시청이 아니라, 한적한 리슐리외 공원에 세워졌다가 나중에야 다시 칼레 시청 앞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공공 기념상들이 높은 받침대 위에 위풍당당하게 설치되는 것과 달리 로댕은 칼레의 시민 상을 최대한 지면에 가깝게 세워 마치 지면 위에 평범한 인간들이 고뇌하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의회의 반대로 1895년 제작된 기념상 아래에는 1.5m 높이의 받침대를 두어야 했다. 1924년 기념상이 시청으로 옮겨지면서 받침대의 높이도 로댕의 원래 바람대로 최대한 낮춰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칼레의 시민 [The Burghers of Calais] (두산백과)

     

    적어도 내가 로댕의 작품을 통해 만나본 칼레시의 사회 지도층들은 영웅으로 보여지지 않았다. 그냥 우리 옆집에 살고 있는 평범한 힘없고 나약한 노인들의 모습이 보였고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하러 가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우리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나는 현대의 프랑스 사회의 지도층들이 여전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정신에 입각해 정치를 해 나가는지 의문이 오늘 들었다. 프랑스 사회는 이제 지구상에서 사회지도층과 같은 국가적 위치를 구축하고 있고 그들이 늘 자랑스럽게 말했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 신문에 비유럽국가 출신의 유학생에 대한 국립대 등록금을 대폭 인상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학생단체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최고 행정법원이 정부의 손을 들어 줬다고 한다. 정부야 합리적인 이유들을 들면서 정책의 정당함을 이야기 하겠지만 이 정책 실행 이후 비유럽국가 출신의 유학생들은 지금보다 15배나 많은 등록금을 내고 공부를 해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정책은 프랑스 사회가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포기한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국가들은 점점 국수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하면서 그 시작을 알렸고 이제 프랑스도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 과연 독일은 어떤 노선을 선택할 것인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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