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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여행] 프랑스혁명의 시작 : 로베스 피에르해외여행 2020. 7. 5. 20:44
1792.8 민중의 튈르리궁 습격으로 왕정이 끝나고 '공포정치'의 서막이 열리다
7월, 아니, 혁명력으로 치면 ‘뜨거움의 달’이라는 뜻이 되는 테르미도르의 태양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뙤약볕 아래에서 한 사나이가 두 손이 묶인 채 혁명 광장에 높이 솟은 단두대의 계단을 올랐다. 두 명의 형리가 그의 목을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고, 잠시 뒤 40킬로그램에 달하는 칼날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순간 붉은 물보라가 테르미도르의 푸른 하늘을 가렸다. 형리들도 군중도 무덤덤했다. 그런 장면은 대략 일 년 전부터 질리도록 보아온 것이었으니. 지금 막 단두대의 제물이 된 사람도 오늘만 20번째의 제물이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날이면 날마다 백주대낮에 펼쳐지는 살육극의 막을 올렸던 장본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였다는 점일 뿐.
로베스피에르씨, 파리에 가다
로베스피에르. 그는 순수한 혁명가인가, 피에 주린 몽상가인가?
로베스피에르는 1758년 5월 6일, 북프랑스의 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친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혼했고,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죽자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유럽을 방랑했으므로, 로베스피에르는 일곱 살 때부터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로베르피에르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으며, 파리의 명문 학교인 루이르그랑 학원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고대 철학자들과 영웅들의 이야기에 심취하는 한편 장 자크 루소의 사상에도 깊이 공감했다. 17세 되던 해에는 막 새로운 왕이 된 루이 16세가 루이르그랑을 방문하자, 생도 대표로 환영사를 하기도 했다. 이 짱구머리에 애늙은이 성향이 있는 소년이 장차 왕의 목숨을 빼앗는 주역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왕도 로베스피에르도 몰랐으리라. 학업을 마치고 아라스로 돌아온 로베스피에르는 변호사가 되는데, 검사로 위촉되기도 했지만 “사형을 구형하는 일이 싫어서” 그만둔다. 그리고 힘 없는 서민을 위한 변호사로서 점차 명성을 쌓아갔다. 1789년 5월에 루이 16세가 176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하자, 로베스피에르도 ‘제3신분’ 대표 중 하나로서 파리에 간다. 그리고 7월의 바스티유 습격(프랑스 대혁명시작) 전후 삼부회가 국민의회로 재편되자, 북프랑스 출신 의원들 중심으로 결성된 브르통 클럽(자코뱅 당)의 일원이 된다.
루이 16세는 그리 뛰어난 군주는 아니었지만 폭군도 아니었다. 오히려 온화하고 선량한 편이어서 즉위 초에는 많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둘러싼 여러 추문(사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던),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에게 심취한 지식인들과 그들을 뒷받침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불만, 경제난과 식량 가격 폭등 때문에 한껏 고조된 도시 서민(상퀼로트)과 지방 농민들의 저항 의식 등이 한데 겹쳐 한때 유럽에서도 가장 찬란했던 프랑스 왕조는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온건파들이 주도권을 잡았던 혁명 초기의 국민의회 시기에는 입헌군주제 도입과 봉건적 특권의 원칙적 폐지 등에 왕이 합의함으로써 그럭저럭 정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계속적인 식량난으로 폭동이 점점 자주, 거칠게 일어나자, 루이 16세는 비밀리에 외국으로 망명하려다 붙들리고 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왕을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급진파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 중심에 로베스피에르가 있었다. "왕을 죽여라!" 1792년에는 여전히 식량난과 폭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왕정 폐지를 요구하는 공화파, 그것에 반대하는 왕당파 사이에 유혈 충돌까지 빚어졌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침공했다. 긴장과 불안이 고조되던 끝에 8월 10일, 상퀼로트들이 튈르리궁을 습격했다. 그들은 호위병들과 교전하여 1천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끝에 루이 16세 일가를 탕플 탑에 유폐시켜 버린다. 이로써 왕정은 끝장이 났고, 국민의회도 해체되어 새로 국민공회가 조직된다. 국민 선거로 구성된(그러나 투표권은 재산에 따라 제한되었고, 그나마 유권자의 10퍼센트만이 참여한 선거였다) 국민공회는 대체로 세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공회당의 가운데에서 가장 ‘우익’에는 브리소, 베르니오, 콩도르세 등의 지롱드파 가, 중간에는 중도적인 평원파가, 그리고 가장 ‘좌익’에는 자코뱅파가 포진했다. 자코뱅도 단일한 세력이 아니어서, 상퀼로트와 가장 친화적이며 급진 평등주의 개혁을 주장하는 에베르파, 마라와 당통 등의 코르들리에 클럽, 그리고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등의 몽타뉴로 나뉘었다. 이처럼 분파가 다양했지만, 한편으로는 분파 사이의 견해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사실 지롱드도 원래는 자코뱅에 속해 있던 사람이 다수였다. 에베르파를 제외하면 대체로 부르주아적인 경제, 사회정책을 추진했으며 출신 성분도 엇비슷했다. 정파들 사이의 대립은 주로 정치 문제를 놓고 불거졌으며, 그 중에서 가장 뜨거웠던 감자는 루이 16세의 처리 문제였다.
1792년 8월 10일, 튈르리궁을 습격한 민중. 이로써 왕정은 끝났다
자코뱅은 루이 16세의 처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야만 그의 복위를 노린 국내외의 반혁명 움직임이 잠잠해질 것이기에. 또한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식량난 문제가 혁명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를 덮어버리기 위해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하기도 했다. 반면 지롱드는 왕의 권한을 박탈했으면 그것으로 되지 않았느냐고 여겼다. 자코뱅의 고집을 당할 수 없는 지롱드는 굳이 그를 처벌해야 한다면 재판을 거쳐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자코뱅은 “이처럼 명백한 죄인에게 재판은 필요 없다”고 반발했으나 결국 타협이 이루어져 1792년 12월에 왕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왕에게 죄를 씌우는 일은 근본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았다. 구체제의 법으로는 물론이고, 1791년의 헌법에서도 왕은 주권자로서 불가침의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법리적으로 왕이 내란이나 외환을 시도하지 않은 이상, 통치를 잘못했거나 국민이 증오한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루이 16세가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 혁명 정부를 뒤엎으려 했다는 혐의는 입증할 근거가 부족했다. 스스로에게 법정의 권한을 부여해 왕을 재판하는 국민공회는 권력분립의 원칙도 위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로베스피에르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먹혀 들었다. “왕은 무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무죄라고 선언하는 순간 혁명이 유죄가 된다. 이제 와서 혁명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을 죽여야 한다. 혁명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1793년 1월 19일, 재판은 끝났다. 그리고 이틀 뒤 단두대가 루이 16세의 피를 맛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단두대 위에서 얼어붙은 혁명
루이 16세의 처형은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까지 프랑스에 맞서는 계기를 제공했다. 기존의 방식대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게 된 정부가 징집령을 발하자 방데 지방을 중심으로 맹렬한 반정부 운동이 벌어졌다. 여기에 혁명정부에서 내놓은 경제대책의 실패(신화폐 ‘아시냐’의 폭락, 곡물거래 자유화 조치의 부작용 등)로 경제난이 심화되며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졌다. 이러는 중에 혁명군을 앞세워 값진 승리를 따내 온 ‘혁명영웅’ 뒤무리에까지 적국에 항복하고 망명해 버리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대안은? 로베스피에르가 말했다. “공포”다! 프랑스혁명은 민중이 왕이나 귀족들 없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자유에는 미덕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를 절제하는 미덕 없이는 자멸적인 혼란만 빚어질 뿐이다.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프랑스 민중은 아직 그런 미덕이 부족하다. (…) 그러므로 공포를 통해 그들의 방종을 단속하고 사랑의 매로써 그들에게 미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또한 혼란을 틈타 곳곳에서 혁명을 뒤집으려 획책하는 사악한 반혁명 분자들을 철저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로베스피에르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당통(왼쪽)과 끝까지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한 생쥐스트
1793년 6월, 자코뱅의 사주를 받은 파리 코뮌의 노동자들이 국민공회에 난입했다. 그들은 지롱드파 의원들을 반혁명 분자라며 끌어내고, 자코뱅 일색의 공안위원회는 즉석에서 지롱드파 29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들은 약 넉 달 뒤 루이 16세를 처형한 단두대 앞에 선다. 이로써 막이 오른 공포정치는 1년 사이에 1만 7천 명을 단두대로 보냈고, 지방 반란 진압 과정에서 따로 3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지방에서의 ‘반혁명파 박멸’ 과정은 단두대보다 더 화끈해서, 사람들을 수백명씩 구덩이에 몰아넣고는 대포알 세례를 퍼부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숫자지만, 반정부 운동의 중심이었던 방데가 일시적으로 진압되었을 때에는 한꺼번에 25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왕비는 물론, 루이 16세 재판 당시 그의 변호인이었던 사람이나 왕에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은 증인들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프랑스 사상 최고의 과학자로 손꼽히는 라부아지에, 낭만주의 시의 선구자인 셰니에, 유명한 천문학자였고 혁명 초기에 국민의회 의장을 지냈던 바이이도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다. 공안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이 모든 죽음을 진두지휘했던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권을 억압하는 자들을 응징하는 일, 그것이 자비입니다. 그런 자들을 용서하는 일, 그것은 야만입니다. 폭군의 잔인함은 그저 잔인함일 뿐이지만, 공화국의 잔인함은 미덕입니다.” 미덕을 가지지 않은 자는 살 가치가 없었고, 그 ‘미덕’의 기준은 로베스피에르와 몇몇 자코뱅이었다. 지롱드의 뒤를 이어 에베르파가 숙청되고, 마라가 암살되고 당통마저 부정부패 혐의로 단두대로 보내지면서 로베스피에르의 독재는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과연 공포의 힘으로, 극심했던 파리와 지방의 소요도 한때 진정되었다. 혁명은 제 자리를 잡은 것 같았고, 더 이상 토론해야 할 쟁점도, 개혁해야 할 제도도 없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혁명은 단두대 위에서 얼어붙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때는 한여름이었다. 얼어붙은 정국이 오래 버티기에 테르미도르의 태양은 너무 뜨거웠다.
공포정치의 주역, 자신들이 수립한 방식 그대로 재판 받고 처형 당하다
1794년 7월 27일, 혁명력으로는 테르미도르 9일, 국민공회. “친애하는 공화국 시민 여러분, 국민공회의 동료 의원 여러분, 저는 어떤 당파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저는 차라리 모든 당파를 없애고자 합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오른팔인 생쥐스트가 아직도 남아 있는 로베스피에르 반대파에 대한 숙청의 전주곡으로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마디 읽기도 전에, 흥분으로 얼굴이 벌개진 탈리앵이 의석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그리고 생쥐스트의 가슴을 거칠게 떠다밀었다. 이어서 에베르파에 속해 있던 비요 바렌이 역시 살기등등한 얼굴로 단상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격려를 받으며, 탈리앵이 공회장을 빙 둘러보며 목청껏 소리쳤다.
“저는 그저께도 이런 고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오늘도 또 어김없이 동료 의원들에 대한 모략과 중상이군요. 이 자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동료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재앙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늪 속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제안합니다. 이 사악한 음모의 장을 이제 그만 걷어치워 버립시다!” “옳소! 옳소!”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당통이 죽은 지 110일 동안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의 독무대였던 국민공회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흐름처럼 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일어서서 발언권을 요청했으나 흥분한 의원들의 고함 소리에 묻혀 버렸다. 끝내 공회를 뛰쳐나온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코뮌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장 국민공회를 공격해서 ‘반혁명 분자’들을 쓸어버리자, 핵심 주동자들만 체포하자, 공안위원회의 정식 소집을 기다려야 한다 등등으로 갑론을박을 하는 사이에 날이 저물고 코뮌 노동자들은 하나 둘씩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시청에서 농성 중이던 로베스피에르 일파를 부르동과 바라스가 이끄는 위병들이 습격했다. 난투가 벌어졌다. 생쥐스트의 친구 르바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탱은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망치려 했다. 몸이 불편하여 휠체어 신세를 지던 쿠통은 떠밀려 계단에서 곤두박질쳤다. 로베스피에르는 턱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르바처럼 자살을 시도한 것인지, 위병들이 쏜 총에 맞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습격을 당하는 로베스피에르와 단두대에 오르는 모습
날이 바뀌어 7월 28일, 공포정치의 주역들은 자신들이 수립한 방식 그대로 재판을 받았다. 사실 관계 조사도 없었고, 변론의 기회도 없었다. 그들의 죄를 고발한 검사 역시 공포정치 내내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온 푸키에 탕빌이었다. 오후 다섯 시,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쿠통, 오귀스탱, 그 밖에 18명이 마차 3대에 나누어 실린 채로 혁명광장으로 끌려갔다. 공포정치 동안에는 그래도 당통이나 에베르 같은 거물의 경우 사형 판결이 나고 나서 며칠의 유예는 두었으나, 이들은 오전에 선고 받고 그날 오후에 바로 사형장으로 가야 했다. 민중의 소요를 염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연도에 나와 구경하던 민중은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욕을 하거나 조롱을 퍼붓는 시민들과 매춘부들… . 어느 골목을 돌 때는 추레한 행색의 노동자들 몇몇이 서 있다가 마차에 대고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이 자식들아,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로베스피에르는 모든 것을 달관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혁명광장의 한가운데 높이 솟은 단두대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오랫동안 지식인들의 골칫거리였다. 마르크스는 그의 진정성은 인정하면서도 부르주아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문제의 근원인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정치의 힘에만 기댔다고 보았다. 한나 아렌트는 그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없애는 자가당착을 저질렀고, 스탈린의 피의 숙청과 수용소군도의 모델을 만들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방법이 문제가 있었더라도, 민중과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꾸밈없는 사랑은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 그는 보다 온건한 정치를 할 수도 있었으나 워낙 급박한 상황이 그를 어쩔 수 없이 살인귀의 길을 걷게 했다는 입장, 로베스피에르를 물리친 테르미도르의 주역들이 곧 부패와 타락에 빠져 추하게 물러나고 말았음을 지적하며, 로베스피에르보다 그의 적들이 더 문제였다고 하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분명 그는 순수했던 인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진정 순수한 인간이, 아무런 사리사욕이 없이 스스로 정의라고 믿는 일을 할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앙시앙 레짐(프랑스 혁전 전의 시기) 하의 프랑스는 사회를 세 가지 계층으로 분류했다. 제1신분은 ‘성직자’이며, 제2신분은 ‘귀족’, 제3신분은 ‘평민’이었다. 왕은 신분을 초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제1신분은 성직자 전체로 구성되며, 전통적으로 고위 또는 하위 성직자로 나뉜다. 이 두 분류상의 구분 기준은 없지만, 고위 성직자들은 대체로 귀족 출신 성직자이며, 제2신분 가문 출신이었다. 루이 16세의 시대에는 모든 프랑스 주교는 귀족이었고, 18세기 이전에는 그런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머지 하위 성직자는 본당 성직자(parish priests), 수사(monks), 수녀(nuns)로 나뉘며, 제1신분의 약 90%를 구성하고 있다. 1789년 당시에는 이들 하위성직자들은 약 13만명 가량이었으며, 전체 인구의 0.5%에 해당했다.
제2신분은 프랑스 귀족과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왕족으로 군주 자신은 이 신분 제도를 초월한 존재였다. 제2신분은 전통적으로 왕실과 시정을 하는 주요 계층인 문관 귀족(nobility of the robe)과 무관 귀족(nobility of the sword)으로 나뉘었다.
제2신분은 프랑스의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였다. 앙시앙 레짐 하의 제2신분은 부역을 면제받았고, 소금세나 인두세(가장 오래된 형태의 가장 중요한 세금)와 같은 대부분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이러한 과세 면제는 그들을 개혁에 소극적으로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제3신분은 위의 두 분류에 속하지 못한 모든 이들이며, 도시민(urban)과 농촌민(rural), 두 분류로 나뉜다. 도시민에는 프랑스 인구의 8%를 차지하는 부르주아지가 포함되어 있었고, 장인과 같은 임금 노동자도 이 분류에 속하였다. 농촌민에는 소작농과 농장 신분이며 이들이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3신분에는 도시의 신진 부르주아지와 같은 지금의 중산층이라고 여겨지는 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3신분을 연대하게 해 주었던 것은 대부분 부가 축적되지 않았고, 다른 신분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높은 세금을 강요당하는 것이었다.
숫자21과 루이16세
루이 16세는 1774년부터 1792년까지 프랑스 왕국을 통치한 부르봉 왕가 출신의 마지막 왕이다.
본명은 루이 오궈스트이며 프랑스 혁명으로 퇴위당한 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그로 인해 '마지막 루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으며 루이 15세의 손자이다.
1770년에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뜨와네트와
결혼했다. 마리 앙뜨와네트는 프랑스 궁정에서 사치의 대명사로 불리며 시민들의 분노를 사서
결국 프랑스 혁명을 촉발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 16세와 반혁명죄로 처형당했다.
루이 16세는 숫자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 21시 전에 잠들거나 21일에는 외출을 삼가했다.
루이 16세는 어린 시절 잔병치레를 많이 했고, 2살 되던 해에는 결핵으로 죽을 뻔 했다.
당시 손자를 걱정한 루이 15세는 점성가를 불러 점을 치게 해 미래를 예측하게 된다.
점성가는 "루이 16세는 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숫자 21을 조심해야 한다"고 예언을 했다.
루이 16세와 상극의 관계에 있는 숫자 21이 루이 16세에게 큰 화를 입힌다는 것이다.
이후 루이 16세의 아버지와 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루이 16세는 왕이 된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숫자 '21'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에 왕이 된 후에도 강박증에 사로잡혔다.
루이 16세는 묘하게도 21세에 대관식이 진행되자 여러 행사를 미루고 칩거에 들어간다.
또 21명 왕족들의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렸고, 이로 인해 국민들이 혁명을 일으킨다.
루이 16세가 혁명군에게 사로잡힌 날도 1791년 6월 21일로 숫자 21일이 또다시 일치한다.
1792년 9월 21일 루이 16세는 국민들에게 공개재판을 받게 되며 1793년 1월 21일 사형을 당한다.
루이 16세의 사형을 주장한 사람은 17년 전 루이 16세에게 환영사를 낭독한 로베스피에르였다.
당시 로베르피에르는 루이 16세가 숫자 21에 대한 불안감에 환영사를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나자
모욕감을 느꼈고 굴욕에 대한 복수로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이 16세가 공개재판을 받은 날도 21일, 사형을 당한 날도 21일이었다.
루이 16세에게 저주를 내린다고 하는 숫자 21은 어김없이 루이 16세에게 재앙을 불러오고 있었다.
혁명세력인 국민공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한 날도 1792년 9월 21일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일으켜 루이 16세의 왕권을 박탈했고, 루이 16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 그가 죽는 장면을 지켜봤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의 끝은 아니었다.
얼마 후 루이 16세가 처형된 바로 그곳에서 로베르피에르 역시 처형됐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루이 16세는 평생 동안 숫자 21을 두려워해서 피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숫자 21의 저주를 극복하지 못하고 바로 21일 날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숫자 21에 숨겨진 미스터리는 과연 저주일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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